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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찰탐방>제왕운기가 뭐지? 우연한 발걸음이 역사를 잠시 돌아보게한다.
    국내여행/강원도 2024. 7. 11.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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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의 명산이 아니더라도, 깊은 산은 물론 가까운 숲길로 들어서면 의례히 조용한 명상과 기도를 하게 만들것만 같은 암자와 사찰이 있다.

    강원20대명산챌린지를 겸한 산행을 위해 찾은 두타산과 쉰움산에도 익숙한듯, 익숙하지않은 사찰이 있다.

    두타산 삼화사(頭陀山 三和寺)쉰움산 천은사( 頭陀山 天恩寺)는 모두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로, 쉰움산(오십정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두타산에서 분기된 능선의 안부와 같은 지형이기에 모두 두타산의 숲에 자리를 잡은 사찰이라는듯 일주문에도 쉰움산이라고는 표기되지 않고 있다.

    두 사찰의 본사인 월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 강원특별자치도 중남부에 있는 60여 개의 절을 관리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643년(선덕여왕 12)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으로 얻은 석존 사리와 대장경 일부를 가지고 돌아와서 통도사와 함께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중요문화재로는 8각9층석탑(국보 제48호),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보물 제140호) 등이 있다.          - 다음백과   참조 -

    삼화사는 두타산의 명승지인 무릉계곡의 초입에 자리잡은 사찰로, 옛날에는 삼공사(三公寺) 또는 흑련대(黑蓮臺)라고도 하였다.

    석식영암(釋息影庵)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말에 세 사람의 신인(神人)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지금의 삼화사 자리에서 모의(謀議)를 하였다.

    그들이 가버리자 그 지방 사람들은 그곳을 ‘삼공(三公)’이라 하였으며, 얼마 뒤 사굴산(闍堀山)의 품일(品日)이 이곳에다 절을 짓고 삼공사(三公寺)라 하였다는 것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

    많은 사찰, 유명한 사찰은 자장, 의상, 원효 등의 들어봄직한 유명한 고승이 창건하였다고 기록을 전하는데, 의외로 삼화사는 월정사의 말사이면서도 "품일"이라는 인물이 절을 지었다고 기록한다.

    일부러 삼화사를 찾지 않는다. 대한민국 제1의 명승지 중 한곳인 무릉계곡을 찾았다가 마음의 평안을 잠시 누려보고자 들러보게 되는 사찰이 삼화사일테다.

    대부분의 계곡은 자연과 환경보호라는 이유로 입수를 금지한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승지일수록 그런 단속의 눈길은 심하다. 그러나 무릉계곡은 오래전부터 무릉반석의 넓은 바위에서 드러누워 신선이 그러했을듯한 여유를 즐기는 행위가 지금까지도 자연스럽다.

    그렇게 몸과 마음의 여유를 즐길수 있는 곳이 두타산 삼화사이다.

    동해시 삼화동 무릉계곡을 휘돌아 삼척시 미로면으로 향한다. 삼화사는 밝은 양의 기운이 강하다면 숲의 분위기가 습한 음의 기운이 더 드러나는 천은사는 758년(경덕왕 17)에 두타삼선(頭陀三仙)이 백련(白蓮)을 가지고 이곳으로 와서 절을 창건한 뒤 백련대(白蓮臺)라고 하였다. 839년(문성왕 1)범일국사(梵日國師)가 극락보전(極樂寶殿) 등을 건립하고 규모 있는 사찰로 만들었으며,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李承休)가 중수하고 이곳에서 대장경을 열람한 뒤 간장암(看藏庵)이라고 하였다. 이승휴는 또 이 절이 있는 용계(龍溪)에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하였고, 71세 되던 해에는 그가 머물렀던 용안당(容安堂)의 현판을 내리고 간장사로 바꾼 뒤, 이 절에 전답 등을 시주했다고 한다. 조선 선조 때는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이곳에 와서 절을 중건하고, 절의 서남쪽에 있는 봉우리가 검푸른 것을 보고 흑악사(黑岳寺)라고 하였다. 1899년에는 이성계(李成桂)의 4대조인 목조(穆祖)의 능(陵)을 수축하고 이 절을 목조의 원당으로 삼았는데, 이때부터 천은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

    많은 사찰이 사건, 재해로 중수하고 중건하는 과정을 거치며 명맥을 유지한다. 천은사 또한 그런 과정에서 절(암자)의 이름마저 수없이 바뀌다가 지금의 자리까지 오고 있다.

    산을 좋아하니 산을 핑계삼아 잠시 스쳐지나가며 만나는 사찰들이지만, 숲의 풍경과 함께 전하는 느낌이 다르다.

    『제왕운기』의 구성은 중국사·한국사를 각 권으로 분리했고, 강역도 요동(遼東)에 따로 천지세계가 있어 중국과 엄연히 구별되는 생활영역임을 밝혔다. 또, 우리 민족은 중국인과 다른 천(天)과 연결되는 단군을 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임을 나타냈고, 당시까지 민간신앙이나 고기류 등을 통해 전승되어온 단군신화를 한국사체계 속에 편입시킴으로써 우리 역사의 유구성을 과시하였다. 또한 『제왕운기』는 중국과 우리 민족과의 지리적·문화적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우리는 중국과 구별되는 독자성·자주성·주체성을 가진 우수한 문화민족임을 국민 각자에게 자각하게 하여 몽고의 정치적 지배에 대항하는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하여 제작된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동명왕편」과 함께 고려 중기의 대민족서사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삼국유사, 삼국사기"와 같은 역사서가 아닌 국문학 분야의 서가로 분류하기도 한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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