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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당산성>백제의 토성은 조선시대에 들어 석성으로 개축된다.
    국내여행/충청도 2023. 7. 24.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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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번의 방문으로 기억이 온전할까? 그렇다고 다시 찾을 열정은 없다. ^^;

    지난 6월 우암산과 상당산성을 청주에 머무는 동안 한번은 찾아보자며 거닐며 만나보았던 상당산성은 무더위에 우암산을 거닐었던 후유증때문인지 나름 규모가 있어보였다.

    상당산성 안내도

    사진상으로는 1번의 남문(공남문)에서 상당산성의 트레킹과 탐방이 시작되고 끝나는듯하지만, 우암산을 오르며 만나는 상당산성은 제승당이 위치한 10번 구간에서 시작된다.

    상당산성이 처음 축성된 것은 백제시대 때 토성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상당산성이라는 이름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통일신라 때 행정구역인 서원소경이 청주에 설치되는데 이때 김유신의 셋째 아들 김원정(원정공)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 이후 조선시대 선조 29년 임진왜란 당시 개축되었다가 숙종 때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산성의 면적은 12.6ha, 성 둘레 4,400m이며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석재로 수직에 가까운 성벽을 구축하고 그 안쪽은 토사(土砂)로 쌓아올리는 내탁공법(內托工法)으로 축조하였으며 높이는 4.7m이다.       - 두산백과   참조 -

    제승당

    제승당이 위치한 곳은 숲속의 쉼터가 기업의 1사1공원관리의 사업으로 "올레쉼터"라는 이름으로 넓게 조성되어있다.

    제승당은 산의 정상부에 있지 않고 정상이 가로 막혀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의 전망은 성내의 주요한 부분은 보이지만 성의 서쪽 바깥은 보이지 않는다.
    동장대와는 서로 마주볼 수 있는 위치이고, 장대의 아래로 경사면을 내려와 다시 평탄한 넓은 대지가 있어 보다 큰 규모의 건물이 아래쪽에 있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기록에는 서장대는 6칸 건물이라 하였고, 『읍지』에서는 서장대가 곧 제승당이라 하였다. 서장대의 건축은 1728(영조 4)년에 우후(虞侯) 이희태(李凞泰)의 재임 때 장대가 지어지고 영사가 수리되었다고 하였으나 이미 1716년의 초기에 건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참조 -

    상당산성에서 바라본 청주시내

    제승당에서 시계방향으로 돌며 거니는 길은 성터의 축성된 돌 위쪽으로, 과연 성을 방어하기위한 병사들의 안전이 확보되는 시설일까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길을 걷는다.

    그렇게 거닐다 만나는 서장대의 관문은 서문(미호문)이다. 상당산성의 주요 관문은 동문, 서문과 남문의 세곳과 함께 비밀스런 출입이 가능한 동북암문과 서남암문이 있다.

    성벽 안쪽으로 짧지만 암릉지형이 형성되어있다.
    포루터

    미호문(서문, 弭虎門)은 지형이 호랑이가 뛰기 전 움츠린 모양과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호랑이가 떠나면 땅기운이 다하므로 호랑이의 목에 해당하는 곳에 성문을 세웠다고 한다.

    그렇게 서문쪽에서 잠깐의 조망과 함께 둘러본 시간을 뒤로하고 나의 걸음과 마음은 시계바늘처럼 저 앞을 돌고 있다.

    그러면서도 또 의문, 서문을 지나면서의 길은 이미 석축형의 성을 쌓지않아도 될만큼 날카로운 암릉의 형태를 띤 지형인데 왜 굳이 그 밖으로 성을 쌓았을까? 불과 1~2m의 거리에 자연암릉 지형을 활용하면 수고로움이 덜 했을텐데라는 생각을 해보며, 치성(稚城)이나 적대(敵臺) 위에 포를 배치하고 건물을 지은 군사시설이라는 포루를 잠시 스쳐간다.

    그렇게 시계방향으로 돌며 성터를 거닐다 잠시 성터의 안쪽 숲길로 들어서면 상당산(492m)을 만나게 되고, 정북을 지나 동쪽으로 향하다보면 제승당 이후의 두번째 성문을 만나게 된다.

    두번째 성문은 동북암문(暗門)으로 암문 - 한자를 확인하지않았을때에는 바위로 된 문 정도로 생각했다~ ^^; - 은 성을 몰래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사잇문으로, 통로의 역할 이외에도 동문밖 골짜기로 모여드는 적군의 뒤쪽으로 가서 포위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비밀스런 문이다.

    동북암문을 지나 성터길을 거닐며 바라본 내성의 모습은 또 의아함이 가득하다.

    내성의 모습은 건물과 성터와 관련된 시설들로 가득해야할텐데, 아무리 시대흐름과 함께 복원하더라도 너무 숲으로 방치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 나름 성터 안의 모습도 구획된 도시와 같은 형태여야 하지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너무 숲으로 뒤덮힌 모습이다.

    상당산성길을 거닐면서 너무 쓰잘데 없는 의구심을 가지고 둘러보는 것은 아닌지? ^^;

    그냥 걸었다면 우암산에 이어 거니는 상당산성길에서 또 열사병에 걸려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마 이런 저런 평가(라고 쓰며 잡생각이라 말한다.)를 하며 거닐다보면 서문(미호문)에서 동문(진동문)에 도착하였으니 절반을 거닌것일까? 그러면 상당산성 한바퀴도 포기할란다. ^^;

    진동문(동문)은 동남쪽 해발 350m 내외의 상대적으로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통로 양쪽에 벽을 쌓고 그 위에 길고 평평한 돌을 올려 마치 통로가 'ㅁ'자로 보이는 형태(평거형)로 축조되었다. 이런 형태의 성문은 평상시 통행이 많지않은 성문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후 조금만 이동하면 상당산성 첫대면의 장소였던 서장대(제승당)의 정반대에 위치한 동장대(보화정)를 만나게 되는데  보수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지금은 어떤 상태려나?

    동장대에서 지척의 거리에는 모처럼 물구경을 하게 되는 성내방죽(상당마실)을 만나게 되고, 주변에 마실을 즐길만한 식당과 매점이 보인다. 숲속을 바라보며 성내의 마을이나 사람이 거처하는 흔적이 왜 안보일까싶었는데, 방죽 주변으로 형성되어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남문을 향하며 되돌아본 동장대(보화정)
    남문(공남문)

    여유로움과 전날의 산행의 피로가 아니었다면 산성내부의 마실을 돌아봤을수도 있겠으나, 지칠대로 지친 상태이기에 성곽의 흔적만을 따라 거닌다.

    내가 거닐었던 상당산성의 마지막은 남문(공남문)에서 끝난다. 성곽 내부의 삶의 흔적도 만나봤어야했는데...... 아쉽지만 더위에 체력도 정상이 아니기에 욕심을 버린다. 제승당에서 서문으로 거닐며 들었던 의구심은 남문구역의 성곽모습에서 "그래, 우리가 아는 성터의 모습은 이런 모습이지~"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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