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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산성 14성문>인연의 고리가 연결되어 성문종주를 함께~(1탄)
    오르다~ 山!!/명산(서울경기) 2015. 8. 13.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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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거운 열기가 온 대지를 달구고 있는 한여름에 계곡트레킹은 둘째치고, 산책도 아닌 종주라는 거창한 어휘가 쓰인 산행을 감행한다.

    내 지역도 아닌 서울 한복판에서 감히 종주를 할 엄두가 나지않겠지만, 최근 시작한 명산100의 완등축하산행을 기회로 인연이 되어

    그 인연의 고리를 쉽게 풀지않으려는 서로의 마음이 통하였으니, 이때다싶어 혼쾌히 계획을 잡고 따라서 걸음을 옮긴다.

    이런 계획은 너무나도 즉흥적이기도 한듯하면서, 한번 내뱉은 말은 쉽사리 추진하는 능력을 가진 누님(그전까진 도전자라는 칭호였으나~)의 성격처럼 물흐르듯 진행이된다.

    이 계획말고도 또 다른 계획이 기다리고 있다.

    북한산성 14성문 종주, 이것을 실천하고 난 후유증으로 모처럼 의욕상실을 느끼고 있는 지금이지만, 앞으로 기다리고 있을 또다른 계획을 마치고 나면 어떤 후유증에 시달리게 될지?!! ^^

    산행일시 : 2015. 8. 09(일)

    산행장소 : 서울 도봉구, 은평구 및 경기도 고양시 일대 북산산성 14성문

    누구와 : 가칭 "아름다운 고리(이놈의 고리는 과연 풀릴까?!! ^^)" 멤버 5명과 함께~

    산행코스 : 북한산성입구 - 의상능선(팔봉능선) - 산성주능선 - 원효봉능선 - 원점회귀

                    (세부코스) 북한산성입구 -(30분)- 대서문 -(30)- 중성문 -(국녕사 경유, 50분)- 가사당 암문 -(용출, 용혈, 증취봉 경유, 60분)- 부왕동 암문

                    -(나월, 나한, 715봉 경유, 75분)- 청수동 암문 -(문수봉 경유, 10분)- 대남문 -(80)- 대성문 -(25)- 보국문 -(20분)- 대동문 -(동장대 경유, 35분)-

                    용암문 -(용암, 노적, 만경대 스치듯 경유, 80분)- 백운봉 암문(위문) -(대동사, 상운사 경유, 95분)- 북문 -(원효봉 경유, 60분)- 서암문(시구문) -(20분)-

                    수문지 -(35분)- 원점회귀 

    산행거리 및 시간 : 약 15.0km, 약 11:45분 소요(휴식 3:15분 포함)

    설마하니 시간이 이렇게까지 걸릴줄이야~~ ^^

    심야를 타고 강남고속터미널에 도착하여 노숙신세를 또한번 져볼까하려다 조금이라도 쉬자고 조금 일찍 버스에 올라탄다.

    그리고는 터미널 내부(지하)의 찜질방에서 잠을 뒤척이다 일행과 합류하기위해 길을 나서니 어둠속에 빈 택시들만 손님을 기다리고있다.

    그렇게 거리를 배회하다가 나를 픽업해주기위해 나오신 누님과 합류, 산행들머리인 산성매표소앞에 도착하니 이미 모두들 기다리고 계신다.  

    들머리에서 인증사진 한컷을 남기고 잘 포장된 길을 걷다가 만나게되는 첫 성문,

    북한산성에는 6개의 대문과 7개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는데, 그 중 대동문 다음으로 규모가 큰 문이 대서문이다.

    대서문은 의상봉과 수문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성내부로 통하는 주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다.

    ‘북한지’에 의하면 문은 홍예(虹蜺)로 만들어졌고, 초루가 설치되었으며, 현재 성문의 육축부는 폭 19m, 높이 6m, 문지폭 7.9m이다.

    타원형 홍예 출입구는 높이 4m, 폭 3.3m 이고, 홍예 양쪽에는 문루의 배수시설로 짐승의 얼굴을 형상화한 누혈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문의 바깥쪽 홍예 안쪽에는 문비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육축은 3단의 기초석을 쌓아 평지를 조성한 후 8단을 석축하였으며, 그 위로 미석을 한줄로 놓고 여장을 설치하였다.

    여장은 하나의 화강암을 깍아서 만들었으며, 그 가운데 20×30cm의 총안이 하나씩 뚫려있다.

    육축부의 서쪽에는 성벽을 약간 밖으로 내어 쌓았으며, 현재의 문루는 1950년대에 복원된 것이다.  <위키백과 참조> 

    대서문을 지나며 경기지역 셰르파(지역장)께서는 고택이 맘에 든다고~~, 전 사람들 수시로 지나치는 번잡함이 싫다고 응수를 한다.

    어찌되었든 국립공원 지역내에 개인 고택이 당당히 자리잡고 있음이 신기하다.

    포장된 길을 걷는 종주길의 초반부의 국립공원 내의 고택도 특이했지만, 장승도 석재로 제작되어 길가를 지키고 있는 모습도 특이하다.

    무량사라는 조그만 사찰은 그냥 지나치고, 잠시 원효봉 방면을 또 주마간산처럼 스치듯 조망해보고 길을 걷다 선봉사라는 사찰앞의 조그만 동자승 인형들을 보며 미소한번 따라 띄어본다.

    여름철 산행, 종주하면서 이런 계곡물소리 안들리면 죽음이다.

    당연히 그냥 지나치지못하고 잠시 바라보며 이른 아침의 송글송글 맺히는 땀방울에게 쉼을 준다.

    중성문은 1712년 숙종이 북한산성에 행차하여 '서문 가장자리가 가장 낮으니 중성을 쌓지 않을 수 없다'며 중성문을 쌓도록 명하여, 동년 5월 축조가 시작되어 1714년 중성과 함께 완공된 문이다.  <위키백과 참조>

    중성문 뒤로 노적봉(해발 715m)의 암봉을 살짝 담아본다.

    법용사 옆의 계단을 이용하여 국녕사 방면으로 이동한다.

    작은 도토리 알들이 툭툭 떨어지는지 사찰 지붕과 부딛히는 소리가 제법 이른 아침공기와 어울려서인지 시끄럽다.

    사찰 부처님은 해탈하셨으니 그렇다지만, 중생들은 놀래서 기도나 제대로 드릴수 있을까싶다.

    이른 아침의 걸음, 무더운 여름의 종주를 감안하여 무리하지않고 중간중간의 조망을 즐기며 천천히 걷는다.

    여름 모기와 날벌레들의 잦은 공습이 불편하여 산초잎을 뜯어다 얼굴주변에 붙이고, 모자나 배낭의 공간에 꽂아 벌레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로써, 1713년(조선 숙종 39년) 청철()과 철선()이 창건했다.

    그러나 이곳은 사찰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유정()이 수도를 하던 터로 추정되며, 사찰이 들어선 의상봉()은 신라 때의 고승 의상이 참선을 하던 참선도량으로 이름난 곳이다.
    이곳에 사찰이 들어선 것은 북한산성 축조와 관련이 있는데, 당시 팔도도총섭()이던 성능()의 《북한지()》에 따르면, 1713년 북한산성을 축성할 때 팔도의 사찰에 영을 내려 의승()을 뽑았으며, 이들 의승을 산성 안에 두고 성문과 수문·창고 등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 21개 사찰을 창건 또는 보수하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사찰 중 현존하는 것으로는 국녕사를 비롯해 중흥사·태고사·진관사·노적사·승가사·상운사 등이 있다.
    창건 후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단지 창건 때는 총 86칸에 이르는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고 하며 1991년 화재로 모두 불에 탄 것을 능인선원()에서 1998년 10월부터 중창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대웅전과 산신각·종각·요사채가 있다.

    부근에 한월당() 대선사의 부도가 전하나 한월당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두산백과 참조>

    국녕사의 국녕대불과 만불전이 산객을 겸손하게 만든다.

    오늘 걸음 안전하고 무사히 마칠수 있게, 그리고 우리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짧게 빌어본다.

    아침공기를 벗하며 거니는 걸음이어서인지 2시간 가까이 함께 거니는 길이 즐겁고, 가볍다.

    이 가벼움이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모르겠지만~ ^^

    가사당암문(袈裟堂暗門)은 북한산성의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 고갯마루에 위치한 암문이다.

    조선숙종 37년(1711년)에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만든 8개의 암문(暗門) 중 하나로, 현재 백화사가 위치한 의상봉길에서 북한산성으로 오르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했다. 암문은 비상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된 일종의 비상출입구이다.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

    가사당암문은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門樓)는 마련하지 않았으며, 성문 양쪽은 장대석으로 쌓아올리고, 그 위 천장 부분은 장대석 여러 매를 걸쳐 만들었다.

    이런 양식의 성문을 아치 모양의 홍예식과 구분하여 평거식(平据式)이라 부른다.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가사당암문 아래에는 국녕사(國寧寺)가 자리잡고 있는데, 국녕사는 북한산성의 축조, 수비, 관리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승병이 주둔한 승영사찰(僧營寺刹)이었는데, 가사당암문의 수축과 방어를 담당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까닭에 가사당암문은 국녕문(國寧門)으로도 불린다.  <위키백과 참조> 

    가사당암문까지는 산성계곡을 끼고 거니는 걸음, 암문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능선(의상능선)길을 거닐며 앞에 보이는 용출봉(해발 571m)을 시작으로 봉우리를 오르게된다.

    분명히 첫봉우리를 올랐는데 뒤에 있는 네녀석은 무엇이냐??

    오늘 거닐고 있는 이 의상능선의 터줏대감, 의상봉(해발 502m)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각자 남겨본다.

    북한산을 동네산처럼 여기시는 두 형님들께선 인증샷 생략~!!

    산자수명(山紫水明), 햇빛을 받아서 산은 보랏빛으로 물들고 물은 맑아서 또렷하게 보인다.

    곧 산수의 경치가 눈부시도록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말로,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산명수려()가 있다.

    해인삼매(海印三昧), <불교> 석가모니가 화엄경을 설할 때에 들어간 선정(禪定)으로, 고요한 해면(海面)이 만상(萬象)을 비추듯 번뇌를 없애고 우주의 모든 것을 깨닫는 경지를 말한다.  <두산백과 및 어학사전 참조>

    자명해인대(紫明海印臺)에 대하여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봐도 명확한 해석이나, 누구의 글씨인지 출처가 불명확하다.

    그리고 무슨 바위인지 알지못하고 지나치기 아쉬워 담아두었던 녀석, 용혈봉에서 바라보며 이야기해주는데~~

    명산40과 이어지는 명산100을 통하여 북한산, 도봉산을 오르며 제대로 암릉미를 느끼지 못한 산행이 아쉬웠다면 오늘의 성문종주는 그런 아쉬움을 조금은 달래며 즐길수 있는 걸음이다.

    그런 걸음에 휴식을 주는 것이 이런 식물들일게다.

    용혈봉(해발 581m), 의상능선을 거닐며 바라다보는 원효봉 능선의 봉우리들(원효봉, 염초봉, 그리고 구름속에 머리를 숨긴 백운대 친구들)

    여장(女墻)이란 성벽 위에서 적의 공격으로부터 은신할 수 있는 방패의 역할을 하면서 활이나 총을 쏘기 위해 구멍이나 사이를 띄어서 쌓은 작은 성벽으로,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져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여장의 형태는 삼각형, 사각형, 반원형, 사다리형 등 다양하며 여장의 중간에 총안까지 갖추어 방어력을 높였으며, 각각의 기울기를 달리하여 원거리부터 근거리까지의 방어에 활용할 수 있도록 제작, 설치되었다.  <세계미술용어사전 참조>

    부왕동 암문을 가기전에 만나게되는 천연 바위의 성랑지(城廊地)는 성곽에 딸린 초소건물이자 병사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곳이라고 한다.

    요즘 산객들에겐 비박지로도 활용되는 곳이라는데, 깨끗하게 사용하지않아서인지 악취가 진동을 하니 나같은 사람은 하루밤은 고사하고 잠시라도 터를 잡고싶지않다. 

    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은  외부는 홍예 모양으로 만들었고, 내부에는 성의 바깥쪽으로 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있으며, 북한산성을 축성할 당시 남쪽은 대남문과 소남문, 암문을 하나씩 만들 계획이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소남문(현 대남문)과 암문 2개(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을 만들었다.

    부왕동(扶王洞)은 증취봉 아래에서 발원하여 삼천사로 내려가는 계곡으로 예전에 이곳 삼천사에서 가까운 신혈사에서 임금(고려 현종)을 구한 적이 있다고 하여 왕을 도운 계곡이란 뜻으로 부왕동(扶王洞)이라 명명했다.  <위키백과 참조> 

    보통의 능선길은 걷기 편한 길이다라고 생각하고 걷는데, 이곳 의상능선쪽 길은 결코 만만치않으면서 재미를 준다.

    북한산성 주변에는 약 140여개의 성랑지가 있다고 한다.

    부왕동 암문 직전의 성랑지는 천연바위가 만들어낸 곳이라면, 나월봉을 오르기전에 만나게 되는 성랑지는 그 터만 남아서 복원공사를 진행중인듯하다.

    나월봉(해발 651m)을 지나, 나한봉(해발 688m)에서 바라본 나월봉과 여전히 구름속에 머리를 감추고 있는 북한산(삼각산)의 풍경을 조망해본다.

    나월봉 앞쪽으로 암봉위의 뾰족히 튀어나온 녀석때문에 그림자가 해시계를 만들어줄듯한데, 왜 나침반 바위라고 불리게 되었을까??

    청수동 암문으로 가는 성곽길은 옛 성터의 훼손을 복원하기위한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우리같은 무지몽매(문화재에 대하여)한 이들에겐 왜 청테이프를 저리 붙여가며 공사를 할까싶기도하지만, 하나하나 고증을 거치고 기록을 남기며 복원해 나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슬슬 지쳐가는걸까요?? 성문앞에서 단체 인증샷을 남기며 잘 왔는데 단체샷도 귀찮은건지 자연스럽게 찍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결국 독사진으로 청수동암문을 인증을 남겨본다.

    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은 북한산의 나월봉과 문수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으며, 1711년 숙종 37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暗門) 중 하나로, 탕춘대성과 비봉에서 성 안쪽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

    청수동암문은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門樓)는 마련하지 않았으며, 성문 양쪽은 장대석으로 쌓아올리고, 그 위 천장 부분은 장대석 여러 매를 걸쳐 만든 평거식(平据式)암문이다.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 있다.  <위키백과 참조>

    청수동암문에서 잠깐의 걸음으로 도착하게되는 대남문(大南門)은 초기의 이름은 소남문(小南門)이었으며, 규모는 조선시대 단위로 높이 11척, 너비 11척이다.

    현재의 문루는 복원된 것이다.  <위키백과 참조>

    아침식사도 하지않고(행복통신 누님이 챙겨준 옥수수 한통씩 뜯어먹으며 걸은게 전부) 거닐다 보니 점심보다는 이른 아침을 대남문에서 해결하고, 인증샷을 남긴다.

    이른 아침또한 선아누님의 정성스런 준비(연잎밥 등등)와 사전통보가 있었음에도 바리바리 싸들고 오신 누님, 형님들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배낭안으로 또 들어간다.

    종주한다면서 왜 이리 무겁게들 싸들고 다니시는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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