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생가>명절, 아이들을 위하여~
내가 아이였을때도 명절, 휴일에 대한 기대가 컸으리라!!
우리의 아이들도 그러할텐데, 씀씀이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나로써는 아이들의 희망이 되질 못한다.
그래서, 나의 이런 부족함을 옆지기가 채워주는 것이 천만 다행이다~~싶지만, 가끔 너무 기분을 낸다는 점에서 싫은 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인지, 올해 한가위 명절을 맞아 아이들의 옷가지를 챙겨주기위한 쇼핑을 함에 있어 살짝 조심스러운 표정이다.
그래도 두녀석의 옷가지를 사다보니 몇십만원이다.
암튼 서로 별 불만없이 아이들의 명절을 위한 쇼핑이 끝났으니 다행스러운데, 큰녀석은 뭐가 또 불만인지 뾰루퉁이다.
또 욱~하는 성질을 삭힌다고 삭히지만, 그 본성이 쉽게 가라앉질않는다. ㅜㅜ
점심을 먹기까지 슬쩍 옆지기와 큰딸아이의 행동을 지켜보니 쇼핑공간에 있었던 아이들을 위한 완구코너가 원인인듯싶다.
작은녀석이 그걸 보았더라면 또 꽤나 투정을 부리고, 눈물을 흘릴것을 예견하여 모른척하고 지나쳤더니 큰 녀석이 오히려 뾰루퉁이다.
어느녀석 하나에게 맞추기가 쉽지가 않으니 부모노릇하기도 쉽지가 않다.
그래도 옆지기는 나의 욱 성질과 큰녀석의 의기소침을 조율해 나가는 현명함을 보여주니 엄마의 지혜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또 감사한 천생연분이다. ^^
옆지기는 농담삼아 던지는 진짜 남의 편이라고 여기더라도...... ㅎㅎ
옆지기의 지혜로 원만해진 나와 딸의 분위기에 맞춰, 단순히 쇼핑만으로 장거리 이동이 아쉬움에 이정표에 보이던 유적지 관광을 해보려한다.
명성황후 생가, 세종대왕릉 등을 찾아보려했으나, 집에 홀로 계실 어머니때문에라도 시간을 아껴서 귀가해야하겠기에 한곳만을 찾아본다.
아이들의 명절맞이 꼬까옷을 사기위해 원정쇼핑을 한다.
뭐~ 시골에서 여주의 아울렛까지 왔으니 원정쇼핑이 맞다. ^^
아침에 출발하여 쇼핑을 하면서 지름신 강림하는 것이 두려워, 빨리 끝냈음에도 지갑이 털~털~은 아니고, 카드가 열심히 골짜기를 스쳐지나갔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점심, 허기짐을 달래며 쉬어간다.
10여년전 여동생네와 함께 먹었던 쌀밥한정식집을 옆지기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당시와 비교하여 길이나, 주변 풍경은 많이 바뀌었고 음식의 느낌도 많이 변한듯하지만, 쌀밥맛 하나는 여전히 좋다.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우리가족의 역사문화탐방시간이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 국가유공자가족임을 증명하고 저렴하게 구경한다.
역사문화탐방이 뭘까?? 그런것보다는 아이들의 눈에는 연못의 잉어, 붕어들의 움직임이 더 신기하다.
우리는 착하다.
안내도의 순서에 따라 기념관부터~~ ^^
명성황후는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의 비로, 뛰어난 외교력으로 나라의 자주성을 지키면서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다가 1895년 일본인들에 의해 무참히 시해되어 일생을 마친 비련의 주인공이다.
이곳 생가는 그런 명성황후가 1851년 태어나 8세까지 살던 집이다.
기념관을 들어서며 꼼꼼하게 읽어나가지는 않지만, 아픈 역사, 그리고 황제와 황후의 슬픈 전기를 바라보면서 숙연해지고 또 욱~~하는 끓음이 올라온다.
명성황후 생가 기념관에서 만나는 정보, 세종대왕릉보다는 오늘의 탐방과 연장선상에 있는 홍릉을 다녀올까라고 잠시 혼자 생각해본다.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어, 일본인에 의해 무자비하게 시해된후 황후로 책봉된 명성황후의 기념관을 돌아보며 아이들의 인증사진을 남기고~
기념관을 돌아본후 명성황후 생가로 가는 길에 잠시 추모비를 담아보고,
명성황후 생가는 원래 조선 숙종 13년(1687년)에 숙종의 장인이며, 인현황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막으로 건립되었으나, 당시 건물로서 남아있는 것은 안채뿐이었으나, 1995년 사랑채, 행랑채, 별당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1호인 "명성황후 탄강구리비"는 명성황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1904년도에 고향집(별당 자리)에 세운 비석이다.
탄강(誕降)은 왕이나 성인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말하는 것이고, 구리(舊里)는 고향이라는 뜻으로 명성황후가 태어난 옛 마을이란 뜻이된다.
비석 뒷면에는 조선 제27대 임금인 순종황제(명성황후의 아들)의 친필로 전해지는 "광무팔년 갑진오월일 배수음체경서(光武八年 甲辰五月日拜手飮涕敬書)"라는 글귀가 새겨져있다.
- "광무팔년 갑진오월일 배수음체경서(光武八年 甲辰五月日拜手飮涕敬書)" 광무팔년(1904년) 오월 어느 날 두 손을 맞잡고 공손히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썼다.
명성황후 생가터에 세워진 "민유중 묘, 신도비"로 민유중(1630~1687)은 인현황후의 아버지로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의 장인이며,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이다.
신도비는 묘로 가는 길목에 세워져 임금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으로, 비의 기단석의 몸통은 거북이 형상이며, 머리는 용의 모양으로 오른쪽으로 틀어져 묘소를 향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150m지점에 민유중의 묘가 있다.
민유중의 묘에는 가보지 않았다.
다가오는 한가위 명절, 추석에 조상의 묘소는 다녀와야지~ ^^
명성황후 생가를 지나 민가로 조성해놓은 전통가옥 몇채, 그때 당시의 건물과 마을의 모양을 갖추기 위해 조성된 듯싶다.
잠시 쉬어가도 좋으련만, 꼬맹이들은 굴렁쇠, 널뛰기에 소소한 체험을 땀을 흘리며 즐긴다.
민가에서 감고당으로 향하는 길에 조그마한 소원바위, 집안의 큰아들로서 자식이 없어(1남 2녀를 두었다가 모두 일찍 죽었다) 근심하던 민치록 부부의 소원을 들어주어 명성황후를 낳게 한 바위라 하여 소원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는데 우리집 식구들은 무슨 소원을 저리도 빌고 있는지?!!
옆지기와 꼬맹이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길(나에게도 좋은 일일듯하니~ ^^) 바라며, 감고당을 둘러보며 안팎의 풍경을 담아본다.
감고당(感古堂)은 조선왕조에서 두 왕비를 배출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숙종의 계비인 인현황후(1667~1701)가 장희빈과의 갈등속에서 왕비에서 물러난 뒤 복위될때까지 5년여 동안 이곳에서 거처햐였으며, 명성황후(1851~1895)가 8살때 여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간 후 1866년(고종3년)에 왕비로 간택, 책봉되기까지 이곳에서 머무렀다.
감고당은 본래 서울 종로의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위치해 있었으나,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졌고, 이후 해당지역에 고등학교 신축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2006년 명성황후 생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던 여주군이 현재의 위치로 이전, 건축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전통가옥의 형태를 띄면서도 왠지 전통미가 빠진듯한 느낌을 조금은 받게된다.
산에서 걸을때는 힘들어도 즐거운데, 아이들과의 정신적 교류를 하면서 함께 걷는 짧은 시간은 결코 쉽지가않다.
옆지기도 버티지못하고 감고당 문틀에 주저앉아버린듯~~ ^^